鐵甕城
Polaris 본문
도시에서 으뜸가는 극작가, 소설가, 시인, 예술가라 불리던 이가 실종되었다. 무대 위에 올리는 연극마다 흥행하고 발표하는 시마다 성공하여 백 명의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천 명을 관객을 열광하게 한 거장이지만, 본명이나 나이, 생김새, 성별까지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아 '그림자'라고만 불리던 이. 그가 언제 이 도시에 처음 그 재능을 선보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끝내 밝혀낼 길도 없이 '그림자'는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온 도시가 수수께끼로 가득한 그의 생애와 그의 실종에 관한 얘기로 떠들썩했으며 모든 신문의 1면에는 그의 예술 작품, 극과 노래, 소설과 시에 대한 평론이 실렸다. 그 때문에 도시의 뒷골목 작은 방에 살던 한 남자의 실종에 관한 사소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뭇 옛사람들에게 바다는 미지와 공포의 공간이었지만, 모험심과 개척 정신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항상 존재했다. 나무판자를 덧대어 이은 배에 기꺼이 한 몸을 싣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이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 북쪽 밤하늘에서 변함없이 빛나며 수많은 항해자들을 이끌고 구원하는 별. 나는 그의 존재가 이 도시의 북극성과 같다고 여겼다.
밤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는 것처럼 이 도시에도 찬란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독보적으로 빛나는 이는 전무후무했다. 어떤 별이라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고 사그라들 터였다. 많은 이들이 그 재능을 시기하였으며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재능을 탐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수많은 추종자와 적대자를 이끌고 발 디딜 틈도 없이 가장 높은 곳에서 관중들을 내려다보며 작품을 써 내려가는 예술가였지만, 그의 모습부터 이름까지 아무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은 오로지 '그림자'라는 가명만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저 고통받는 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의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이들을 치료하고 싶어 도시로 올라와 커다란 병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낮에는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고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인공 불빛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머나먼 타지에서의 생활은 꽤 고되었으며, 내가 가는 길이 옳은 방향인지 고민할 때가 많았다. 그 시기에 광장 게시판에 붙은 '그림자'의 연극 포스터를 만난 것은 운명이나 다름 없었다. 큰 기대 없이 보러 간 연극의 막이 내려갔을 때, 나는 그 곳에 앉은 관객들 가운데서 가장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저명한 극작가 '그림자'가 극을 새로이 선보인다는 사실에 온 도시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나 또한 가장 먼저 표를 구해 '그림자'의 연극이 올라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마침내 관객석에 앉아 연극을 관람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끝내 이어지지 못한 채 죽는 비극적인 내용에 관객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훌륭한 연극이었지만, 막이 내려가고 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에 떨떠름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감정을 갈무리하고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을 훔치며 최선을 다한 배우들을 향해 관객들과 함께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그때 관객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그 곳에 있는 배우와 관중 모두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릿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극장 밖으로 나와 그 남자를 뒤쫓아갔다. 푸른빛이 도는 연미복 차림의 남자는 미끄러지듯 극장을 빠져나와 거리로 섞여 들어갔다.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아간 나는 간신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숨을 한 차례 고른 후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막이 내려간 후에 왜 미소를 지으셨나요? 극은 전혀 우스운 내용이 아니었는데요."
남자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며 작게 휘파람을 불더니 내게 반문했다.
"혹시 제 옆자리에 앉으셨던가요?"
"아뇨,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다만 모두가 슬피 울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는데, 어째서 당신만은 그렇게 웃고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여전히 옷자락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남자가 연극처럼 기계적으로 미소 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께서도 다른 이들과 같이 그냥 저 극의 내용에만 깊이 몰입하시면 됩니다."
그 순간 나는 극이 끝났을 때 느꼈던 미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이 바로 '그림자'로군요."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극은 당신이 작품이 아니에요. '그림자'라는 필명을 빌려 쓴 전혀 다른 사람의 작품이죠. 사람들은 어차피 '그림자'의 진짜 모습을 모르니까, 다른 누군가가 '그림자'라는 이름을 빌려 극을 올려도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거고요."
남자가 입가를 매만지더니 이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만면 가득 끌어올렸다.
"실례지만 그 뒤에 일정이 따로 없으시다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얘기를 마저 나누어도 괜찮을까요?"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조용한 카페테라스에서 나는 연미복을 입은 남자와 마주 앉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나의 이름과 직업을 간단히 물어보았고 나는 질문에 대답했다. 남자가 두 손을 깍지 끼고 턱 밑에 가져다 대고는 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치료사 선생, 평상시 '그림자'의 작품을 많이 즐겨 보셨나 봅니다."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주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왜 이 극이 '그림자'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나요?"
나는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답했다.
"저는 '그림자'의 작품에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길에 확신이 사라질 때가 많았거든요. '그림자'의 작품은 항상 저에게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해주었어요. 등장인물들은 방황하다가도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아가죠. 그 결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역할이 선한 역이든 악역이든 상관없이, 결국엔 스스로 움직여 답을 얻어가요. 마치 나에게도 내 안의 답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하지만 오늘 올라온 극은 그렇지 않더군요.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절망하여 서로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엇갈려 끝내 만나지 못하는 결말이었잖아요. 제가 아는 '그림자'라면 이런 식의 스토리는 쓰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 상황을 극복하게 하거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주연들을 그 자리에 주저앉히진 않았을 거예요."
내 답을 듣고 남자는 입술을 오므려 오, 하고 감탄사를 작게 내뱉더니 이내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맞아요. 오늘 올라온 극은 제 작품이 아니었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답을 듣고 놀랐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장난을 치는 악동과 같이 무구함과 잔혹함이 묻어나오는 미소를 짓고 남자는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순히 그 극의 수준이 너무 떨어졌다는 뜻이에요. 도시의 위대한 예술가 '그림자'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모욕적인 수준이었죠!"
하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남자의 배를 잡고 양발을 굴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극이 끝나고 웃음을 지으셨나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으신가요?"
마치 나를 시험하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가 질문했고 나는 기꺼이 그 시험에 응했다.
"당신은 그 곳에 앉아 있던 관객들을 비웃으셨군요. 진짜 '그림자'가 아닌, 그를 사칭한 다른 누군가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그 극에 깊이 감명받아 진실된 눈물을 흘리던 그들이 우스워서요."
정답을 발표한 학생을 칭찬하는 선생처럼 남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저는 당신이 참 마음에 듭니다."
바깥은 어느 새 어둑해져 새까만 밤하늘 위로 밝은 별들이 가득 흩뿌려져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한적한 거리를 남자와 나란히 느긋하게 걸었다. 남자가 카페에서보다 한층 밝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적이 처음인 건 아닙니다. 어떤 누군가는 '그림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극을 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림자'의 이름을 빌려 시를 발표하죠. 이 도시엔 '그림자'의 이름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답니다."
경쾌한 남자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으며 나는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왜 진실을 밝히지 않으시고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나요? 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이 진짜 '그림자'라고 말하지 않는 거죠?"
남자가 또 한 번 개구쟁이같이 짓궂은 미소를 내게 지어 보였다.
"재미있잖아요? 필명 하나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감탄하는 대중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밖에 안 나오거든요. 저라는 찬란한 빛이 있는 한 '그림자'는 도시 어디에나 드리워져 있는 겁니다. 아무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지 못하죠. 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아름다운 난장판인지요!"
남자는 말을 마치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듯한 그 행동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에요. 또한 사칭범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당신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당신이 공식 선상에 모습을 드러내 무엇이 진짜 당신의 작품이고 무엇이 가짜의 작품인 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남자가 표정을 싹 굳혔다. 상처를 입은 것이 역력한 티를 내며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지금 제 탓을 하시는 건가요? 엄밀히 말하면 잘못은 저를 사칭한 사람들이 저지른 거죠. 저는 오히려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요."
남자가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처량한 표정을 짓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당신 잘못이라고 탓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자 남자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밝게 미소 짓고는 품 안에서 팸플릿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럼 저와 내기합시다."
"내기라니요?"
남자가 팸플릿을 내게 내밀었다. 복잡한 문양의 뱀이 그려진 팸플릿에는 새로운 극의 제목과 극본가의 이름 '그림자'가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내가 팸플릿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동안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다음 달에 '그림자'의 새로운 극이 도시 중앙 홀에 올라올 거예요. 그다음 달에는 '그림자'의 새로운 소설이 발표되어 도시에서 가장 큰 중앙 서점에서 판매될 예정이고요. 당신은 저와 함께 그 작품들을 감상하며 '그림자'가 앞으로 올릴 다섯 작품들이 진짜 저의 작품일 지, 아니면 단순한 사칭범의 작품일 지 알아맞히는 겁니다. 연속으로 다섯 번을 모두 맞추면 당신이 이기는 거예요. 그럼 저는 공식 선상에 모습을 드러내 가짜 '그림자'를 폭로하고 무엇이 진짜 저의 작품인지 낱낱이 밝히겠어요. 만약 당신이 한 번이라도 연속으로 알아맞히는데 실패하면, 그대로 사람들은 가짜 '그림자'에 속아 넘어가는 거고요."
시종일관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끌어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언뜻 피곤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 이 천재 극작가는 삶이 무료해서 미쳐버리기 직전이었구나. 눈에 보이는 동아줄은 무엇이든 붙잡고 싶을 정도로 간절했구나. 바로 그 찰나의 연민이 내게 하여금 말도 안 되는 남자의 내기에 응하도록 이끌었고, 죽는 날까지 후회하게 될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대중들이 계속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 지 알지 못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법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방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그림자'의 극이 새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면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납시다, 치료사 선생. 아, 저는 벌써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걸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아이처럼 해맑은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앞으로 만날 때마다 계속 당신을 '그림자'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흠,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사실 저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익숙하지 않아서요. 당신이 내키는 대로 부르도록 해요. 아니면 제 이름을 직접 지어주시겠어요? 오로지 당신만이 불러주실 저의 새로운 이름을요."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새로운 이름을 지어달라니, 반응을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본 내 눈에 밝은 별 하나가 들어왔다.
"폴라리스(Polaris)."
"폴라리스? 북극성이요?"
흥미가 섞인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의 작품이 제게 방향성을 제시해 줄 때가 많았다고. 비단 저 뿐만 아니라 도시의 수많은 이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깊이 감명 받았을 테죠. 당신에게는 각기 다른 곳에 흩어진 대중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강렬한 힘이 있어요. 북쪽 밤하늘의 절대적 축에 고정된 북극성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별들이 그 주변을 회전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남자가 내 손가락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입가에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가 환하게 걸렸다. 크게 뜨인 두 눈동자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전부 담기라도 할 듯 찬연히 반짝거렸다. 대중에게 '그림자'라고 불리던 남자였으나 앞으로 '폴라리스'라고도 불릴 극작가가 말했다.
"폴라리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저의 새로운 필명으로 삼고 싶을 만큼요. 하지만 이것은 오직 당신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니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요. 암, 그렇지요, 누가 지어준 이름인데요! 좋아요, 앞으로 저를 폴라리스라고 불러주세요."
폴라리스와의 내기에 응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무엇이 '그림자'의 진짜 작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림자' 그 자신 뿐이었으므로, 만일 그가 내 대답이 틀렸다 말한 들 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내겐 끝내 알 길이 없었다. 또한 폴라리스가 '그림자'라는 것은 오로지 그 혼자만의 주장이었으며, 그가 정말 '그림자'가 맞는지 아닌지 또한 내가 알아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면, 도시의 그 누구라도 그가 바로 천재 극작가 '그림자'라고 확신할 수 있을 터였다. 폴라리스는 학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듣는 이를 유쾌하게 만드는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그와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더욱 기다려졌다. 그는 정녕 타고난 예술가였다.
"우리 치료사 선생께서는 그리 자신만만하게 '그림자'의 작품을 안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이번에도 진짜 '그림자'의 작품을 맞히는 데 실패하셨군!"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폴라리스가 유쾌하게 말했다. 싱글벙글 웃는 미소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벌써 두 번 연속 '그림자'의 작품을 사칭범의 것이라 말한 뒤였기에 나는 약이 오를 만큼 올라 있었다.
"폴라리스, 내가 네 작품을 맞추지 못하는 게 그렇게 신나?"
폴라리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 재미있어.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을 느껴본 게 너무나 오랜만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 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 엄밀히 말하면 넌 네 작품과 명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야? 수많은 관객들이 보내는 찬사가 전부 네 것이어야 했다고."
내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며 폴라리스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무엇이 진짜 나의 작품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관객들은 필요 없어."
"나도 무엇이 네 진짜 작품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나도 필요 없어?"
내가 눈을 흘기자 폴라리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내 앞을 재빨리 가로막으며 폴라리스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너는 다르지! 나는 네가 계속 답을 틀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이 내기가 끝나지 않아야 네가 나와 더 오래 어울려줄 거 아니야?"
필사적으로까지 보이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나는 결국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내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너와 기꺼이 어울릴 거야, 폴라리스. 나는 너의 오랜 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제 친구잖아."
폴라리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는 양팔을 내렸다.
"우리가 친구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친구가 아니면 뭔데?"
우리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폴라리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의 또 다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다시 만난 폴라리스는 그날의 대화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나도 더 이상 그에게서 답을 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사실 폴라리스가 항상 북극성인 것은 아니야. 알고 있었어?"
폴라리스의 말에 나는 읽고 있던 '그림자'의 신작 소설을 덮었다.
"무슨 뜻이야?"
창밖으로 밝은 빛이 비쳐 들어 폴라리스의 얼굴 위로 잔잔히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폴라리스가 품에서 고무 공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고 한 바퀴 빙글빙글 돌렸다. 빠르게 돌아가던 고무 공이 회전 속도가 늦춰지며 크게 휘청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주기적으로 원을 그리며 운동하는 바람에 북극의 위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변화한다는 뜻이지. 아주 오래 전에는 폴라리스가 아닌 다른 별이 북극성의 역할을 했고, 또 긴 세월이 흐른 후엔 전혀 다른 별이 북극성의 역할을 하고 있을 거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폴라리스가 곧 북극성이라는 것이 사실인 양 받아들여지지만, 결국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단골 대사였다.
"네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자주 하는 말이지. 그러니 살아가는 한 의심을 멈추지 말라."
폴라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손 끝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폴라리스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그럼 폴라리스가 하나의 별이 아니라 세 개의 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몰랐어. 천체에 그렇게 크게 흥미가 있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는 결코 없다는 네 주장대로라면, 폴라리스를 이루는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별도 언젠가 발견될 수 있겠지."
폴라리스의 입가에 다시금 벅차오를 정도로 환한 미소가 가득 번져나갔다. 양쪽 볼이 발갛게 상기된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하하, 응용력이 아주 좋아! 나를 어쩔 수 없이 네게 빠져들게 하는 재주가 있어, 치료사 선생!"
나와 폴라리스의 내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기는 누구의 승리로도 끝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을 계기로 나와 그의 만남이 끝났으니 말이다. 내가 일하는 병원을 자주 찾아오는 단골 환자 중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폴라리스는 알지 못했다.
"'그림자'의 신작 소설이로군요! 선생님께서도 '그림자'의 팬이신가요?"
내 책상 위에 놓인 소설책을 가리키며 출판업자가 반갑게 외쳤다. 폴라리스가 가장 먼저 내게 가져다주었던 '그림자'의 신작이지만, 결국 사칭범의 것이라 밝힌 책이었다.
"네. 맞아요. 이번에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항상 '그림자'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디 사는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어도 저희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죠."
한껏 들뜬 출판업자의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더 이상 폴라리스의 것이 아닌 작품을 계속 그의 것이라 말하며 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출판업자에게 질문했다.
"혹시 '그림자'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가 어디에 살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면 아무 연관 없는 타인이 자신을 '그림자'라 주장하며 원고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나의 심각한 질문에 출판업자는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림자'는 원고를 항상 종이봉투에 밀봉하여 저희 쪽에 전달하는데, 특유의 봉인을 찍었을 때 남는 실링 왁스가 아주 섬세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이라 웬만한 사람들이 쉽게 위조할 수 없거든요. 실제로 예전에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그림자'라고 주장하며 원고를 가져온 적 있었는데 모두 실링 왁스 때문에 들통이 났지요. '그림자'는 이 문양을 책 뒤에도 반드시 남긴답니다. 자, 보세요."
출판업자는 그렇게 말하며 책의 맨 뒷장을 펼쳐 보였다. 출판업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몸통이 어지러이 꼬인 섬세한 뱀 문양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문장을 보자마자 심장이 아래로 빠르게 내려앉았다.
"도시에서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이 전부 달려들어 이 문양을 따라 하려 했지만 결국 전부 실패했답니다. 아직 이 도시의 기술로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죠. '그림자'의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을 다들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덤이고요."
출판업자가 그 뒤로 말을 계속 이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배신감으로 눈앞이 까맣게 뒤덮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바로 잡으려 애썼다.
"소설이나 시집 뿐만 아니라 극의 대본에도 이 문양이 찍혀 있겠군요, 그렇죠?"
"그렇겠죠. 이것이 저희가 '그림자'를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그에게는 나를 포함한 이 도시 전체가 한낱 연극 무대에 불과했다. 이윽고 허탈함이 내 양 어깨를 무력하게 짓눌렀다.
"'그림자'는 원고를 출판사에 어떻게 전달합니까? 출판사가 그에게 보수를 전달할 때는요?"
"글쎄요, 대부분 우편함에 들어 있을 때가 많지만 그의 대변인이 대신 원고를 전달할 때도 있습니다. 어린 소녀가 찾아올 때도 있었고, 키가 훤칠한 청년이 찾아올 때도 있었고."
불현듯 그의 해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폴라리스가 하나의 별이 아니라 세 개의 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저 멀리서 반갑게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폴라리스."
바람에 헝클어진 긴 머리를 채 정리하지도 않고 한걸음에 달려온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어서 와, 치료사 선생! 요즘 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데, 우리의 내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오늘은 또 어떤 진실이나 거짓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정중한 동작으로 그의 손을 떼어 놓았다.
"폴라리스. 이제 저를 속이는 건 그만둬 주세요."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그림자'의 문장이 선명히 찍힌 책의 맨 뒷장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받아 든 종이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담담한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들은 전부 당신의 대변인들이었어요. 철저히 당신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올렸겠죠. 대중들은 당신의 작품과 당신 대변인의 작품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그림자'의 이름을 칭송했고요. 온 도시가 당신에게 속았고 당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군요. 저를 포함해서요."
차갑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불타오르듯 강렬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를 알고 지낸 이래로 가장 생기 넘치는 눈동자였으며, 그 입가에 걸린 것은 잔혹하리만치 해맑고 티 없는 미소였다. 내 비참한 심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칼날처럼 나의 속을 찢어놓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어? 내 명령에 따라 '그림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올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어떻게 눈치챈 거야? 응?"
겉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들뜬 목소리였다. 감정을 다잡기 위해 애써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녕 당신에게는 오로지 당신의 흥미만이 가장 중요한가요?"
그제야 그는 손으로 입을 황급히 막았다. 그럼에도 손 틈 사이로 삐져나오는 잔인한 미소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아, 아니야. 오해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내 앞에서 한번도 당황한 적 없던 남자가 눈에 띄게 허둥대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이 정말 즐거웠어요. 같이 공연을 보고 책을 읽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저희가 진실한 마음을 나눈 친구인 줄 착각했어요. 돌이켜보면 당신은 한 번도 나를 친구라고 불러준 적 없었는데, 저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죠. 당신은 한 번도 나의 이름을 부른 적 없었고, 심지어 저는 지금까지도 당신의 진짜 이름을 모르고 있어요."
마주본 그의 눈에 마침내 나와 같은 감정이 비쳐보였다. 일부러 밝게 끌어올린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이름이 문제였던 거야? 그렇다면 네 이름을 불러줄게. 너에게만은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게! 그러니까 가지 말고 다시 돌아 와. 아직 공연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림자가 손을 뻗었고 나는 뒤로 물러나 그 손길을 피했다. 절망으로 물든 그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폴라리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홀로 빛날 나의 북극성."
도시에서 으뜸가는 극작가, 소설가, 시인, 예술가라 불리던 이가 실종되었다. 그 때문에 도시의 뒷골목 작은 방에 살던 한 남자의 실종에 관한 사소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북극성이 사라진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와 작은 병원을 차렸다. 인공적인 불빛 대신 하늘의 별빛만이 잔잔히 반짝이는 이 곳은 도시처럼 시끄럽고 북적이지 않았다.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 풍경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잠재웠다.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으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바로 외로움이었다. 너무도 뛰어난 탓에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에서 짙게 배어 나온 외로움이 그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감정이 사라진 순간부터 그의 진짜 작품을 판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무엇이 언제부터 그의 외로움을 해소해 주었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이유를 깨달은 날 북극성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유난히 시리고 찬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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