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다크카카오 왕국 (13)
鐵甕城
1. 귀중한 고서로 들어찬 책장과 고풍스러운 무늬로 장식된 책걸상, 육중한 원목 문에 달린 문고리는 모두 키가 작은 아이가 사용할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것처럼 지나치게 커다랗고 높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볕이 나른하게 비쳐 들어왔다. 다크초코 쿠키는 탁자 위에 놓인 제 투박하고 거친 손등 위로 내리쬐는 황금빛을 생경하게 바라보고는 볕이 닿지 않는 쪽으로 손을 옮겼다. 갑자기 탁자 위에서 햇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크초코 쿠키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온 클로티드 크림 쿠키가 아이보리색 실크 커튼을 끌어당겨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불편하신 줄 알았다면 진작 커튼을 쳤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딱히 햇볕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크초코 쿠키는 애써 입을 여는..
독주1. 毒酒. 매우 독한 술. 독약을 탄 술.2. 獨走. 혼자서 뜀. 승부를 다투는 일에서 다른 경쟁 상대를 뒤로 떼어 놓고 혼자서 앞서 나감. 남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혼자서 행동함.3. 獨奏. 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 1.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들리는 건 낯선 소리였다. 공기 중에 짙게 서린 습기가 몸을 무겁게 짓눌렀고 두꺼운 커튼으로 빈틈없이 가리워진 작은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유리를 무성의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맑고 뚜렷한 피아노 소리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닮아서, 그 느릿하고 쓸쓸한 소리가 불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빠르고 격하게 바뀔 때까지 나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거리 양쪽으로 빈틈없이 수두룩하게 늘어선 건물들..
1. 시린 칼날은 서릿발보다 차갑고 마주 보는 두 눈빛은 눈보라보다 매섭다. 검신이 곧게 뻗은 팔과 수평을 이루도록 검을 바로 들어 날카로운 끝이 상대의 명치를 향하도록 겨눈다. 시선은 상대에게서 떼지 않은 채 한 걸음씩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두 무사는 서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마주 본 채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크게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돈다. 전투에 임하는 야생의 맹수와도 같이, 걸음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검의 끝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은 엄숙하고 결연하게. 이윽고 반 바퀴를 돌아 자리가 처음과 반대로 뒤바뀌면 두 무사는 오른발을 동시에 앞으로 내딛는다. 일정하게 유지되던 두 무사 사이의 간격이 처음으로 좁혀지는 순간이다. 서로를..
그 궁에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높은 절벽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선 성벽 너머, 검은 기와를 인 엄숙하고 커다란 궁궐 옆으로 이어진 비좁은 샛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달빛도 전부 넘지 못하는 높은 담이 비교적 작은 궁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은 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기거하던 동궁전으로, 한 때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완전히 전소해 불에 그을린 흔적만이 가득한 공터였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캄캄한 밤하늘 위로 밝은 불꽃이 치솟는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한 경비대원 하나가 뒤늦게 동궁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센 불길이 궁궐을 맹렬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여 궁궐 안의 모든 물을 전부 길어다 불을..
0.내가 있어야 할 곳을 잊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1. 찰나의 영원을 내게 약속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2. 맑은 바닷물이 밀려와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모래사장을 크게 휩쓸고 지나갔다. 무더운 햇살 아래 젖은 모래알이 금세 말라 발아래로 버석하게 밟혔다.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해수면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모래밭 위로 점점이 이어지는 발자국을 고요히 밀려오는 바닷물이 깨끗하게 지워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칼날 같은 눈보라와 사나운 파도가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나의 왕국에 허락되지 않은 풍경이다. 3. 우리의 몸은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고 스치는 바람에도 곧잘 바스라지기 마련이지. 매일 아침 몸에서 떨어져 나간 가루를 모아 그 무게를 헤아리고 있노라면, 결국 풍화되..
0.태양이 지지 않는 밝은 밤에는 극광이 보이지 않고 나는 잠에 들고 싶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1.차라리 삶보다 죽음이 기꺼운 날이 많았다. 2.음울하게 여울치는 보랏빛 바다는 나와 닮았다. 무겁고 탁한 수면은 색이 짙고 불투명하여 그 아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아득하고, 그 때문에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불길하고 난폭한 것을 숨기기에 좋았다. 3. 바다와 맞닿지 않은 담수는 어두운 보랏빛이 아닌 연한 푸른빛으로 잔잔하게 빛났다. 저주받은 바다와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궁에서 멀어질수록 물은 깨끗하고 투명해졌다.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설산의 꼭대기에는 크고 맑은 호수가 하나 있다. 소복하게 눈을 얹은 자작나무들이 늘어선 가운데 자리한 고요한 ..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는 그 아이에게 약했고 그 아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에게 비정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상대에겐 괜히 쓸데없이 말을 건네어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정도로 판단력이 뛰어났다. 한 마디 하소연을 할 시간에 세 번 검을 휘두를 만큼 실력도 충분했다. 서로 검을 맞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화는 짧아졌다. "아버지. 제발 제가 있는 곳으로 와주세요......."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 익숙하고 상대를 곧잘 파악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약함의 증거였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반드시 대치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주 사소한 곳에서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상대의 말과 행동은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스스로의 감정은..
내가 사시사철 눈이 그치지 않는 험난한 산악 지대를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몹시도 지친 나머지 쉴 만한 자리를 찾아 그곳에 주저앉고는 한숨을 돌렸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내가 가던 길을 마저 가려 했을 때, 등 뒤에서 들려온 산뜻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들었다.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소년이라 부르기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청년이라 부르기엔 앳되어 보이는,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흰 갑옷을 걸친 채 커다란 대검을 등 뒤로 둘러멘 사내가 해사하게 말간 얼굴로 천진하게 물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이 근처에 사람이라고는 나와 이 사내가 전부였기 때문에 눈 앞의 사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한테 말을 걸..
그러나 그립지는 않은 아버지께. 제가 지금 발을 딛고 선 이곳은 낮이 길어 이른 저녁에도 등불 없이 돌아다닐 수 있고, 한밤에도 고요하지 않고 다양한 소리들로 소란하여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는 시간이 깁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이가 조국 변방의 작은 마을 하나에 묵을 일이 있다 하여 그의 손에 이 편지를 들려 보내려 하는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성문이 굳게 잠기어 열리는 날이 없고 왕은 높은 성에 틀어박혀 그 누구도 만나주지 않는다 하니 일개 상인에 불과한 그가 이 편지를 당신에게 무사히 전달하리란 기대는 접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처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며 여행하는 동안 고향에 대한 적지 않은 소문들이 제 귀에 들어옵니다. 이 정도면 조국..
궁 안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목련 꽃들을 바라보며 왕자는 가끔 그 나무들을 검으로 전부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따스한 햇볕 한 줄기 들어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철옹성 안에도 봄은 내려앉았다. 황량하고 메마른 나무에 얹힌 흰 눈이 녹아 사라지고, 나뭇가지 끝에 짙은 보랏빛 목련 꽃망울이 맺히면 곧 본격적인 봄의 시작이었다. 자목련은 왕국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봄 동안 곳곳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이었다. 나라의 으뜸가는 전사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눈동자 색, 그리고 왕이 아끼는 보검 중앙에 자리한 보석의 빛깔, 보라색은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상서로이 여겨지는 색이었다. 즉 보라색은 나라의 영광과 승리,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며 나아가 나라와 군주 그 자체였기에,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