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甕城
의지의 주인 본문
절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희뿌연 안개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자잘한 밀가루 입자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꺼풀 안으로 까끌한 밀가루 알갱이가 들러붙는 듯했다. 고운 밀가루 안개는 서늘한 공기에 섞여 들어 시야를 가리고 사지에 얽히더니 이내 두 발 아래 짙게 깔려 땅을 밟고 서 있는지 공중에 떠 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했다. 현실과 아득히 멀어지는 감각이 익숙해졌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는 자만이 백면사에 발을 들일 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절실하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는 자신이 어째서 이 절에 도달한 것인지 소년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백면사의 주인에게 소원을 빌어 바라는 것을 이룬 자들만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에, 소년은 까마득한 산꼭대기에 자리한 절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날 때부터 소년은 다른 이들보다 힘이 세서 무슨 일이든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해냈다. 장정 셋이 덤벼들어도 쉽게 들어올리지 못할 대검을 등에 짊어지고도 도끼를 휘둘러 장작을 패거나 멀리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한가득 길어올 수 있었다. 어느 마을에 가도 힘을 쓰는 일은 항상 소년의 몫이었다. 백면사에 머무르면서도 기꺼이 그러한 일들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소년에게 구도자를 섬기는 자들은 감사를 표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소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절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고 통행을 방해하던 커다란 바위를 공깃돌 들어올리듯 가볍게 들어 옮겼다.
산 아래부터 산 꼭대기의 백면사까지 이어진 드높은 계단은 소원을 비는 이들의 행렬로 항상 북적였다. 각기 다른 욕망을 품은 많은 이들이 백면사의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었다. 백면사의 주인은 이유도 묻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배가 고파 굶주리는 이들에게 하얀 만두를, 몸을 가릴 천 조각을 바라는 이들에게 두꺼운 털옷을, 금붙이를 원하는 이들에게 궤짝이 흘러넘칠 정도의 금화를, 날붙이를 원하는 이들에게 누구든 찔러 죽일 수 있을 만큼 예리하게 벼려진 명검을 주었다. 그리고 학자에게 지혜를, 선지자에게 혜안을, 장수에게 영광을, 예술가에게 재능을 주었으며, 살아갈 마음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의지를 불어 넣었다. 그리하여 소원을 이룬 이들은 마침내 기쁘게 웃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을 떠나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백면사의 주인, 의지의 구도자는 참으로 별난 이였다. 물이 흐르는 정원의 커다란 바위부터 바닥에 깔린 작은 돌멩이까지 모든 것이 새하얀 절 안에서도 구도자는 단연 가장 흰 존재였다. 낮에는 필멸자들을 굽어살피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며, 밤에는 한 치 흔들림없는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에 힘썼다.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거나 수행에 들지 않을 때는 드넓은 절의 한구석에 있는 화단의 자그마한 꽃에 물을 주었다.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는 일체의 행위 없이, 구도자는 스스로를 보살피는 일보다 그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만물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다.
"왜 그러는 거지?"
어느 날은 소년이 구도자에게 질문했다.
"무엇을?"
꽃을 내려다보느라 여념이 없는 구도자는 소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반문했다.
"왜 매번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냐고. 여기 오는 자들은 소원이 이루어지면 네게 감사도 표하지 않고 떠나버리지 않나."
"속세의 모든 재화와 물건은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느니라. 내 손짓 한 번에 생겨나고 스러지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소년은 구도자가 아끼는 꽃들이 소담스레 피어난 화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지만 마당에 핀 이 꽃들은 좋아하잖아?"
그제야 구도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소원을 비는 모든 이들에게 대가로 꽃 한 송이를 가져오라 할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구도자는 소년에게 깨끗한 물이 든 물병을 건네주었다. 소년은 물병을 기울여 천천히 꽃에 물을 부었다.
"너는 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매일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오느냐?"
"나한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 난 남들보다 힘이 세니까. 대가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고."
"마찬가지다. 저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일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대가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래도 그건 장작 패기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능력과 의지가 있음에도 행하지 아니함은 곧 무능과 나태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 내가 남을 돕는 이유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않고 나 자신의 의지를 갈고 닦아 수행하는 것에 있음이라."
구도자의 말을 듣고 소년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장작을 패고 바위를 옮기고 물을 긷는 일이 결국 나의 체력을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인가?"
"그래. 크게 다르지 않지."
구도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소년에게서 빈 물병을 다시 받아 들었다. 이번에는 구도자가 소년에게 질문했다.
"너는 정녕 내게 바라는 바가 없느냐?"
소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딱히 이루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아. 남들보다 강력한 힘이라면 이미 있고, 돈이 필요하지도 않고. 굳이 원하는 것을 말해보자면 세상에 나보다 강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직접 겨뤄보고 싶은데, 이건 네게 소원을 빌지 않고 내가 스스로 이뤄야 하는 목표야."
구도자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구도자의 손길 끝에서 눈처럼 새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구도자는 꽃을 소년에게 건넸고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새하얀 절 안에서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짧게 묶고 기다란 검은 망토를 걸친 소년의 존재는 퍽 이질적이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 옆에 앉아 다른 이들이 무슨 소원을 비는지 지켜보는 건 어떻겠느냐? 다른 이들이 품은 소망을 알 때 네가 원하는 바를 깨닫게 될 수도 있겠지."
소년은 꽃을 코 끝에 가져다 댔다. 꽃에서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다.
"좋아."
이윽고 구도자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소년이 손에 꽃 한 송이를 꼭 쥐고 구도자를 뒤따라갔다.
"그런데 네 소원은 뭐지?"
"모든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져 더 이상 나를 찾아오는 이가 없게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불가능한 소원이군."
소년의 단언에 구도자는 여전히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본디 해탈에 이르는 고행의 길에 끝은 없는 법이니라."
계단에 걸터앉아 털이 폭신한 하얀 강아지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소년은 절을 찾은 이들이 무슨 소원을 비는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갖은 종류의 다양한 소원을 들으면서도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소년은 다시 화단에 새로운 꽃을 심고 있는 구도자를 찾아갔다.
"온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며 충분한 양의 만두를 달라던 자 말이야, 그 자는 어제 소원을 빌고도 오늘 또 온 거 아니었어?"
소년의 품에서 뛰쳐나간 하얀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갔다. 구도자는 무릎을 꿇고 발치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강아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정확히 보았느니라."
소년은 구도자의 옆에 쭈그려 앉아 꽃모종을 화단에 심는 일을 거들었다. 꽃들의 종류는 전부 달랐지만 하나같이 색깔이 하앴으며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럼 그 자가 찾아올 때마다 계속 만두를 내어주는 것인가?"
여전히 고저 없는 말투로 구도자는 소년의 물음에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자의 소원은 끝이 없는 거잖아. 만두는 먹으면 사라지고, 그렇게 채워진 포만감도 하루가 지나면 다 사라지니까. 그렇게 오늘이 지나면 내일도 찾아오고 모레도 찾아오겠지. 당장 그 자의 손에 만두를 쥐여주는 것보다 차라리 만두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만두를 살 돈을 벌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어?"
구도자는 잠시 꽃을 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자의 소원은 만두였다. 만두를 얻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역할 또한 소원을 듣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에서 끝난다."
"그래도 그 방식으로는 진정으로 그 자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진 못해."
소년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자 구도자의 말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그러면, 그 자에게 만두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일 것 같으냐? 정녕 그것이 그 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일 것 같으냐?"
연이은 구도자의 질문에 소년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구도자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물이 가득 찬 물병이 나타났다. 구도자는 그것을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이 물병을 받아 든 순간 물병의 바닥에 자그만 구멍이 뚫렸고 그 밖으로 물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지 않고 소원을 빌러 이곳을 찾아오는 자가 그뿐인 줄 아느냐? 저들이 원하는 것이 만두뿐이겠느냐? 채워지지 않는 것이 어디 공복감뿐이겠느냐? 본디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이 그 안에 아무리 많은 물을 채워 넣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느니라.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물을 붓는 방식을 바꿔도 마찬가지지."
물병의 밑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깨끗한 물이 쉴 새 없이 졸졸 새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소년이 다시 구도자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너는 네 소원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이 일을 계속 하는 거야?"
구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향과 색이 없는 꽃을 화단에 심었다.
시간은 끝없이 흘렀다. 소년은 틈틈이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장작을 패왔고, 보름달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의 우물에서 신선한 물을 길어왔고, 절에 머무르는 이들을 대접할 식사 준비를 거들었으며, 더 많은 이들이 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새로운 건물터를 찾는 것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구도자의 곁에서 다른 이들의 소원을 듣고 절에서 기르는 강아지와 놀아주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소원을 빌기 위해 구도자를 찾아오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구도자가 스스로의 능력이 힘에 부친다고 생각하는 날도 늘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저물 때쯤에야 새벽부터 소원을 빌러 온 이들이 모두 절 밖으로 나가고 백면사에 고요가 찾아왔다. 쉴 틈도 없이 수많은 이들의 욕망에 시달리던 구도자는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넓은 공터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며 수련 중이던 소년은 저를 찾아온 구도자를 보고 대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다른 이들의 소원을 들으니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는가?"
"아니, 점점 더 모르겠어."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소년에게 구도자가 물병을 건넸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물병을 받아 든 소년은 병 속의 물을 마시기 전 병을 높이 들어올려 밑바닥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물병의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 물병에 든 물을 전부 마시고 나서 소년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저 많은 자들이 대체 왜 이런 걸 소원이랍시고 비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대체 네가 왜 그들의 소원을 전부 들어주는지도 이해가 안 가. 여기 오는 자들 중 돈을 원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 중에 정말 생계가 곤란할 정도로 빈곤한 자들은 몇 되지 않아. 커다란 상단의 주인도 있었고, 이미 집을 여러 채 가진 부자도 있었어. 심지어 저보다 가난한 타인의 재산을 뺏어서라도 자산을 늘리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었지. 하지만 너는 그들의 소원을 전부 이루어주었어."
감히 자신을 책망하는 눈길과 해명을 바라듯 다그치는 말투에 구도자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굶주린 자에게 밥을 주지 않고 밥을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것, 재화가 누구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지 판단하는 것, 필멸자의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을 세우는 그 모든 것은 불멸자이며 구도자인 나의 역할이 아니다."
"그럼 누구의 역할인데?"
"지도자의 역할이지."
구도자의 말에 소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순간 구도자의 표정에서 어느 때보다 피로가 짙게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시작하며 백면사의 흰 건물과 바닥이 점차 어둡게 물들어갔다. 구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머무른 이래로 정말 수없이 많은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내게 소원을 빌었던 그 많은 이들 중 나의 소원을 궁금해하는 이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어. 내가 무슨 소원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그것을 고민하고 궁금해하는 이는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다. 너는 아직도 너 스스로의 소원보다 나의 소원을 더 알고 싶은가?"
구도자가 갑작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내자 소년은 의아해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구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나의 사명이기에 나는 나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녕 나의 소원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소원일까?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욕망이 사라져 모두가 마침내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 그리하여 마침내 더 이상 나를 찾는 이가 없어져 나의 맡은 바 사명이 다하는 일이, 정말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이제껏 봐온 수많은 이들의 소원을 생각하며 소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도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아. 그것이 어찌 불가능한 일이겠느냐.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왔느니라. 단 한 번이라도 나와 똑같은 소원을 가진 이가 내게 찾아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비는 것. 진실로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노라."
바람이 불자 꽃잎이 휘날렸다. 구도자가 정성 들여 화단에 심은 꽃의 잎이었다.
"하지만 선한 마음과 이타심을 지닌 그 어떤 이들이라도 내 앞에 서면 자신의 이득을 가장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진실로 절실히 원하는 바가 있는 이들만 백면사에 발을 들일 수 있으매, 본인의 사소한 욕망보다 타인의 소원을 앞세우고 마침내 세상 모두가 해탈에 도달하길 바라는 이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느니라. 나는 수많은 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면서도, 언젠가 나와 같은 소원을 가진 이가 나타나기를 끝없이 소원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네가 이 백면사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라는 것이 없음에도 백면사에 발을 딛은 소년, 그리고 백면사에 발을 딛고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일하기를 자처했던 소년을, 구도자는 끝내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진실로 네가 나와 같은 소원을 빌기를 원했다."
소년 역시 그 순간 그가 구도자와 같은 소원을 갖지 않았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찬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왔다. 꽃잎이 더욱 어지러이 흩날렸다. 구도자는 천천히 눈을 뜨고 다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훗날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네가 너의 욕망을 선연히 마주하고 더 많은 타인의 욕망마저 바르게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어쩌면 나와 같은 소원을 갖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아아, 통탄스럽다. 너에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나에겐 너무나 많은 시간이 부족하구나."
완연한 밤이 되자 백면사의 모든 것이 어둠에 잡아먹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도자는 애써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내게 소원을 빌 마음이 생겼느냐."
"그래."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구도자의 미소를 보며 소년이 대답했다. 구도자는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잠시 나의 할 일을 멈출 것이다. 소원을 빌러 내게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돌려보내고, 번뇌를 물리고 의지를 다잡기 위해 끝없이 길고 지난한 수행의 길에 올라설 것이다. 고치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네가 진실로 바라는 것을 말해보아라."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소년의 보랏빛 눈동자는 선명하게 돋보였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소년은 구도자를 올곧게 마주 보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진 힘이 올바르게 쓰일 곳으로, 나의 힘이 절실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줘."
새하얀 가루 안개가 사방에서 몰려와 발치에 짙게 깔렸다. 곧 눈 부신 빛이 시야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둥그렇게 번져나갔다. 육신의 모든 감각이 아득히 현실에서 멀어지는 도중 가느다란 목소리만이 귓가에 와닿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면 좋겠구나."
혹독하고 매서운 눈보라가 설원 위로 휘몰아치며 섬뜩한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먹구름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고 번개 줄기가 끊임없이 눈 덮인 땅을 휘갈겼다. 소년은 등 뒤에 짊어진 대검을 뽑아 한 손에 굳세게 쥔 채 산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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