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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甕城

우리 탐라 존잘 연성러가 비스트였다니 본문

비스트 단편선

우리 탐라 존잘 연성러가 비스트였다니

逆鱗 2025. 4. 17. 10:21

"님...... 저 요즘 고민 있어요."

 

조명이 어둡고 방음이 잘 되는 어느 룸카페, 안색이 후진 오타쿠 둘이 기둥에 가려진 구석 으슥한 자리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밀크쉐이크를 앞에 시켜두고 빨대를 휘적이고 있는 사람은 트위터 닉네임 쉐도우밀크(@ShADoW_Milk)로, 탄탄한 인체 기본기와 기발한 연출력을 바탕으로 심리학 전문 도서관을 하나 삼킨 것처럼 섬세한 감정선을 만화에 녹여내는 존잘 2차 만화 연성러였다. 얼마나 대단한 존잘이었냐면 쉐도우밀크의 만화가 나오는 순간 탐라가 전부 그 이야기로 뒤집어지고 쉐도우밀크의 캐해석의 그 판의 대세를 넘어 선 공식이 되는 수준이었다. 

 

와, 이번에 쉐밀님 만화 보셨나요. 저 그거 보고 너무 감동 받아서 한 시간 동안 눈물 줄줄 흘리다 탈수와서 응급실 실려갔잖아요. 아니 쉐밀님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오셨길래 이런 대사를 쓰시는 건가요? 쉐밀님의 캐해에선 '고능함'이 느껴진다. 저 이번에 그 부분 너무 좋았어요 P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그 허망한 표정이요. 아 저도요 정말 너무 좋았어요 스크롤을 내리는데 컴퓨터 화면을 꽉 채우는 P의 얼빡샷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P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뭐가 고민인데요? 님 같은 존잘도 고민이 있나요?"

 

쉐도우밀크의 맞은 편에 앉아서 인삼차를 홀짝이는 사람 역시 트위터 네임드 존잘 2차 그림 연성러 중 하나였다. 트위터 닉네임 미스틱플라워(@My_SticFlour), 쉐도우밀크와 전전전장르에서 만났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장르가 겹친 적이 없었으며 그럼에도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오프에서도 서스럼없이 만나는 트친으로, 밥은 먹고 잠은 자면서 연성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속도로 고퀄리티 그림을 매일 기계에서 면 뽑아내듯 좍좍 뽑아내는 초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탐라에서 누군가 이거 보고 싶다고 외치면 조용히 그려와서 툭 던져두고 가는 자비로운 인성까지 겸비한 완성형 존잘이었다. 통칭 천 개의 손, 살아있는 부처, 인간 픽크루, 위대한 구원자 미스틱플라워님. 

 

미플님의 연성 속도는 기계로 뽑아내는 면처럼 빠르지만 맛은 50년간 동굴 속에 처박혀서 수련한 일류 중식 요리사가 밀가루를 정성스럽게 반죽해서 뽑아낸 쫄깃한 수타면의 맛이에요. 미플님은 대체 손이 몇 개이신가요 정녕 이것이 인간의 속도인가요? 아아, 미플님의 이름다운 그림으로 쫄쫄 굶주리던 저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미플님, 이것도 그려주세요, 저것도 그려주세요, 와 감사합니다, 미플님 그럼 혹시 이것도.....

 

"하..... 바로 그게 고민이에요. 제가 너무 존잘이라는 거."

 

쉐도우밀크의 심각한 말에 미스틱플라워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물론 님이 존잘이 맞긴 한데 자의식 과잉 미쳤네요."

 

"아니 이게 헛소리가 아니라...... 한 번만 들어보세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제가 공식인 것마냥 떠받들고 제 캐해만 정답인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너무 별로예요. 다들 별 생각없이 제 캐해를 무작정 갖다 써서 유니크함이 떨어지는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너무 재미가 없어요! 캐해가 좀 다양해야 덕톡을 하고 즐길 맛이 나는데 다들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으니까 지루해서 미쳐버리겠다니까요. 맞장구 쳐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흠, 무슨 얘기인지는 알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그냥 님이 만화를 이제 안 그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쉐도우밀크가 와아악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냐고요! 저는 원래 관종으로 태어난 인간이라 제가 그린 만화를 SNS에 전시해서 찬사와 관심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얘들아! 나를 더 찬양해! 내가 여기에 들인 정성과 고뇌와 지식과 시간을 알아봐 줘! 내가 제일이라고 말해 줘! 하지만 내 캐해를 막 갖다 쓰지 마!!"

 

"뭐 어쩌라는 거예요? 칭찬을 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쉐도우밀크가 탁자를 두 손으로 쾅 내리치자 밀크쉐이크가 든 유리잔이 조금 흔들렸다.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근데 다른 사람들의 연성과 캐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님이 먼저 다른 사람 연성을 칭찬하고 그 캐해를 주류로 끌어올리세요, 그럼."

 

거침없는 미스틱플라워의 해결책에 쉐도우밀크가 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탁자 위로 고개를 처박고 흐느꼈다.

 

"저랑 캐해 안 맞아서 안 돼요...... 아무리 훌륭한 캐해라도 일단 저랑은 다르다고요......"

 

"진짜 '어쩌라고' 밖에 할 말이 없네요."

 

"그리고 사실 다른 캐해라는 게 이제 존재하지 않는달까..... 다들 제게 캐해 위탁을 맡기고 있다니까요, 나한테 돈 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 제가 'P는 사실 어두운 과거 때문에 가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항상 밝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싸늘한 무표정을 짓습니다' 라는 적폐 헛소리를 해도 사람들은 다 믿는다고요!"

 

미스틱플라워가 인삼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로 적폐 해석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님이 뭘 알아! 님이 뭘 알아! 요!!"

 

"당연히 님이 지금 파는 장르는 잘 모르죠. 근데 말씀 들어보니까 님은 2차 창작보단 1차 창작이 더 적성인 것 같은데 왜 오리지널 창작은 안 하시나요? 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텐데요."

 

급발진 발광을 멈춘 쉐도우밀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걸 왜 안 해봤겠어요. 사실 지금도 다른 계정에서 하고 있긴 해요. 반응과 관심도 충분히 받고 있고. 그런데 뭐랄까...... 막 의욕이 나지가 않아요. 나의 번뜩이는 생각과 창작 욕구를 불타오르게 할 존재는 이 세상에 오로지 P뿐인 것 같다고요. 아아, P! 내 연극의 가장 충실한 주연이자 조연, 미세한 감정부터 거대한 행동 동기까지 완벽히 내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가장 아름답고 비극적인 내 인형!"

 

걔가 왜 님 거예요? 원작자 거지....... 라는 말을 했다간 쉐도우밀크의 복장이 진정으로 터지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미스틱플라워는 그냥 입을 닫고 찻잔에 남은 인삼차를 호로록 마셨다.

 

"할 말은 다 하셨나요?"

 

"사실 진짜 고민은 지금부터예요."

 

"여태 징징거렸던 걸로 다 끝난 게 아니라고요?"

 

미스틱플라워의 질색하는 말에도 쉐도우밀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빨대를 입에 물고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들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입 벌리고 앉아서 제 연성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무 재미가 없어서...... 원래 사이가 별로 안 좋던 트친 둘 사이를 이간질 좀 했거든요? 근데 그 둘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오로지 제가 하는 거짓말만 믿고 서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는 순간에...... 그 어떤 찬사와 관심으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도파민이 막 머릿속에서 펑펑 터지는 거예요! 그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고요!"

 

흥분 어린 쉐도우밀크의 외침이 끝나자 미스틱플라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님 진짜 성격 안 좋네요."

 

"저도 그게 문제인 걸 아니까 지금 고민 상담을 하고 있잖아요. 님은 이런 거 경험한 적 없었어요? 어디가서 말 못할 이런 음습한 감정의 소용돌이? 저한테만 말씀해보세요."

 

쉐도우밀크가 은근하게 말하자 미스틱플라워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원래 계정에 그림만 올리고 사담은 잘 안 하는 편이거든요. 교류도 거의 없고. 연성에 대한 관심과 칭찬 그런 것도 받으면 기쁜 건지 잘 모르겠고."

 

쉐도우밀크는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틱플라워는 평상시 계정에 사담을 일절 하지 않으며 고퀄리티 연성만 올리고 사라지는 소위 '분위기 있는 존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좀 짜증이 나서 비계에 한탄을 좀 했죠. 나한테 그림 맡겨 둔 것도 아니면서 틈만 나면 이거 그려 달라고 저거 그려 달라고 왜 저 사람 요청은 들어줬으면서 내 요청은 안 들어주냐며 떼쓰는 사람들이 짜증난다, 뭐 이런 내용이요."

 

"님은 무슨 생때를 들어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그림만 꾸준히 그려서 올리는 게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담용 비계에서 그런 말을 하셨나요?"

 

"님이 한창 P에 빠져서 바쁠 때 있던 일이라 못 보셨을 거예요. 그런데 저와 비계 맞팔이었던 한 사람이 제 트윗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갖다 퍼나르고 공계로 저격을 했거든요."

 

"와...... 이건 부처라도 흑화한다."

 

"그래서 저도 맞저격을 했고 그 사람이 결국 계정을 폭파했어요."

 

"......"

 

쉐도우밀크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어버버, 머뭇거리자 미스틱플라워가 활짝 웃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더 이상 이 계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라는 문구를 봤을 때...... 그 때 깨달음을 얻었죠. 아, 이 세상의 모든 오타쿠 SNS 계정을 전부 없애야겠구나.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무엇보다 커다란 해방감과 후련함을 느낀 것 같아요."

 

미스틱플라워의 상쾌한 표정을 본 쉐도우밀크가 어이없다는 듯 질문했다.

 

"그래서 저도 계폭시키시게요?"

 

"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저를 포함한 모두의 계정이 사라지는 게 제 목표예요."

 

쉐도우밀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님도 성격 참 이상해요."

 

"그럼 더 이상한 말 해드릴까요? 혹시 버닝스파이스님 기억나세요?"

 

미스틱플라워의 입에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에 쉐도우밀크는 손뼉을 마주치며 외쳤다.

 

"아, 당연하죠! 그 분 글을 정말로 잘 쓰셨는데. 저번에 한 편 당 10만자 정도의 총 17편의 대하소설 장편 집필 차력쇼를 보여주셨던 게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트위터 닉네임 버닝스파이스(@BurningSPICE), 코미디 호러 로맨스 판타지 등등 온갖 장르를 다양하게 섭렵하여 못 쓰는 분야가 없는 2차 글 연성러. 비단같이 촘촘하고 고급스러운 문장력과 떡밥과 반전을 군데군데 적절히 깔아두는 강약 조절도 강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치 그 장소 또는 그 시대에 직접 살다와 본 것 같은 미쳐버린 고증력이 특징이었다.

 

여러분 버슾님께서 또 글을 올리셨습니다, 아아 스크롤이 끝도 없이 내려가는 축복, 무한한 영광, 끝나지 않는 감동, 더 주세요 제발. 고등학교 교과서에 버슾님의 글을 실어야만 합니다. 그냥 수특에 실어서 수능 필수 암기 대상으로 지정하죠 우리. 버슾님의 글이 저희에겐 경전입니다. 버메로스, 버익스피어, 버관중, 렛츠 고! 

 

"그 분 그 글 전부 삭제하고 포타 터트렸어요."

 

미스틱플라워의 충격적인 말에 쉐도우밀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왜요? 미쳤나? 도자기 장인이야 뭐야."

 

"몰라요. 글 쓰는 것보다 썼던 걸 지우면서 사람들이 비명 지르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재밌어졌다나. 저도 자세한 이유는 안 여쭤봤어요."

 

"그 분도 진짜 종잡을 수가 없다."

 

쉐도우밀크가 혀를 내둘렀다. 오랜만에 듣는 지인의 충격적인 근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쉐도우밀크는 옛 장르에서 다 같이 친하게 지냈던 나머지 이들의 이름을 꺼냈다.

 

"이터널슈가님이랑 사일런트솔트님은 뭐 하신대요? 혹시 아세요?"

 

"이슈님은 귀찮다고 계정 안들어온 지 몇 년 지나서 저도 잘 모르겠고...... 사솔님은 잡았던 장르가 크게 터져서 오열하는 걸 본 게 마지막이었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기억도 나지 않는 머나먼 옛날, 공허와 혼돈만이 가득했던 탐라에 서로 다른 펜을 잡고 모인 다섯 존잘들은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연성을 가득 심어 달콤한 꿀이 흐르는 낙원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지금 그 때의 숭고한 맹세는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쉐도우밀크와 미스틱플라워는 몇 분간 말없이 마주앉아 이미 오래 전 빈 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SNS를 좀 그만해야겠어요. 방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서 산책도 하고 햇빛도 쬐고.....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와 다시 창작에 전념하고 싶어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쉐도우밀크였다. 뭔가를 떨쳐낸 듯 가벼워진 표정과 눈빛에 미스틱플라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굶주리는 자들에게 연성을 베풀 의지를 다잡아야겠어요."

 

그리고 둘은 이전보다 조금 후련한 마음으로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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